설교(Sermon) 페이지 비주얼이미지

설교(Sermon)

HOME  > 기독교 문화  > 설교(Sermon)

질투하시는 사랑

작성자 : 송필오
작성일자 : 2020-06-22 02:34:13 조회수 : 183
첨부파일 :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4: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어느 추운 겨울 청바지에 긴팔 티셔츠를 입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한 젊은이가 워싱턴 DC 역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3분 뒤 어떤 중년남자가 그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금방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또 4분 뒤 어떤 여성이 1 달러짜리 지폐를 내던지다시피 하고 지나갔습니다. 잠시 뒤 반대편 벽에 기대어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이 나타났지만 손목시계를 힐끔 보더니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의 음악을 가장 주의 깊게 들었던 이는 세 살 정도의 남자 아이였는데 그 아이도 엄마가 빨리 가자며 재촉하던 탓에 오래 있지는 못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바흐의 곡을 연주하는 40분이 넘는 시간 동안 1,000 명 이상이 지나갔지만 잠깐이라도 주위를 준 사람은 총 6명뿐이었습니다. 드디어 연주가 끝나고 음악이 멈추었을 때 박수는커녕 관심을 표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름은 조슈아 벨, 그는 세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명입니다. 그는 지금 역사에 남을 만한 연주를 한 것입니다. 그것도 30억짜리 바이올린을 들고... 불과 이틀 전 보스턴에서 가졌던 콘서트는 최하 13만 원부터 시작하는 티켓이 모두 매진되었을 정도로 성황리에 마쳤던 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떤 작가는 노트에 이렇게 썼습니다.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든 사람들은 조슈아의 곁을 무심히 지나간다. 무관심과 타성, 우울한 잿빛은 복잡한 현대사회에 맞추어 춤추는 어두운 ‘죽음의 무도’처럼 보인다. 우리는 진짜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재능 있다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바로 코앞에 서 연주하고 있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우리는 혹 마음의 눈이 어두워 더 많은 아름다움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비슷한 실수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위대한 분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메시지를 그냥 건성으로 듣고 지나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이처럼 사랑하기에 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주었단다.’라고 말씀하셔도 무덤덤하게 별 감동 없이 지나쳐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시 하나님의 사랑에 주목하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특별히 오늘 나눌 주제는 하나님의 질투하시는 사랑입니다.


질투라고 하면 대부분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옛날 유교문화권에 있던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아내와 이혼 사유가 될 수 있는 칠거지악 중 하나였습니다. 그 정도로 질투는 나쁜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떨까요? 먼저 창세기 30장 1절입니다.


창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외사촌이었던 두 자매, 언니 레아와 동생 라헬이었지요. 원래 야곱은 동생 라헬과 결혼하고 싶어 했으나 지참금 대신 7년을 봉사한 끝에 결혼했지만 외삼촌 라반의 꾀에 넘어가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와 결혼하게 되었고 둘 째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서 또 다시 7년을 외삼촌을 위해 봉사해야 했지요. 그런데 레아는 아들을 계속 낳았지만 라헬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헬이 언니를 질투하여 남편 야곱에게 나로 애를 낳게 하라고 윽박지른 것이지요.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힌 야곱은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소?’라고 화를 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시기는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선동했던 대제사장들의 동기가 시기였음을 눈치 챘다고 마가복음은 기록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같은 의미이지만 보통 시기는 내게 없는 것을 상대방이 가졌을 때 오는 감정이라면 질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이 빼앗을 때 오는 감정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지속되면 결국 상대방에 대한 미움의 감정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출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고린도 전서 13장 4절에 보면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언뜻 보면 두 사실이 모순된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모순될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질투는 과연 무엇일까요? 질투라고 번역된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는 ‘카나’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시기하다, 질투하다, 열심이다’로 번역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와 양, 그리고 비둘기파는 사람을 내쫒으시고 환전상들의 돈을 쏟으신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그 때 그 장면을 묘사한 시편 말씀은 시 69편 9절입니다.


시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라고 말씀하는데 요한복음 2장 17절에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라고 인용되어 있지요. ‘열성, 열심’ 이 단어가 바로 질투라는 히브리어 원어로 똑같은 ‘카나’입니다. 구약성경 다른 곳에서도 동일한 ‘카나’가 ‘열심’으로 번역된 말씀이 나옵니다.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기 나오는 열심,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고자 하는 열심이 바로 질투와 같은 단어인 ‘카나’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오해하기 십상인 질투라는 말이 사용되었을까요? 학자들이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했지만 결국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질투는 좋은 의미에서의 질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 모르게 질투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어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나타내신 사실에는 깊은 뜻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천상을 떠나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하지요. 성육신이야말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과 소통하시기 위한 완벽한 선택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해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전달하실 수 있을까요? 불완전한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다보니 질투라는 단어가 그래도 가깝고 사실적이어서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의 질투라는 단어를 표현의 성육신이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온통 마음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뺏기게 됩니다. 식사할 때나 길갈 때나 운전할 때나 공부할 때나 일할 때 생각이 계속 나는 것이죠. 마치 그가 혹은 그녀가 온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질투는 언제 생기게 되지요?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될 때입니다. 연인이 내 사랑을 거부하고 다른 이에게 갈 때 그렇지요.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우상에게 내 마음이 빼앗기게 될 때, 허무한 우상을 섬기게 될 때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바로 우상숭배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독특한 관계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마치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래서 질투라는 단어는 결혼관계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서 54장 5절입니다.


사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만약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다른 남자나 여자를 사랑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대단히 이상한 일이 아닐까요? 질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남편과 아내의 사랑은 한 마디로 다른 어떤 사랑도 개입해서 나누거나 빼앗아가서는 안 되는 배타적인 관계입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그 관계를 침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아내가 어떤 사기꾼에게 속아 그를 사랑해서 내게서 멀어진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은 어떨까요? 아마 어떤 물로도 끌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불타오를 것입니다. 심지어 질투하는 사랑은 너무나 애절하기에 연인이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혼자 아니면 함께 죽는 길을 선택하는 일도 드물게 일어납니다. 물론 옳은 일은 아니지만 이런 것이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그와 나 사이에 다른 사랑이 개입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도 불사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당구를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아마 주말 뿐 아니라 시간이 나면 당구장에서 거의 사시다시피 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제가 한 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 기억이 하나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저보고 아버지께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간 곳이 당구장이 있는 작은 건물이었습니다. 그 건물 입구에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에 계시니 모시고 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저는 영문도 모르고 혼자 안에 들어갔는데 보니 담배냄새가 자욱한 가운데 아버지가 친구 몇 사람과 같이 당구에 열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보고 놀라시더니 어떻게 왔냐고 물으셨지요. 저는 엄마가 보냈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한창 중인 당구 시합을 중단할 수 없으셨든지 옆에 의자에 저를 앉아 있으라고 하신 후 게임이 다 끝나고 저랑 같이 나왔습니다. 그 후에 부모님이 다투셨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 후로부터 저는 당구라면 도박과 같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진 않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 때의 그 부정적인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 어머니는 아버지의 마음이 당구에게 완전히 빼앗기는 것을 참기 어려우셨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나쁜 의미의 질투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당구에 빼앗긴 아버지의 마음을 찾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질투였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질투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잘못된 대상을 향해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배우자를 향해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솟아나는 강렬한 사랑의 감정,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 그것을 필사적으로 지키겠다는 불타는 사랑이지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바로 그런 질투의 사랑입니다. 일단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약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여기서 나오는 싸움, 다툼, 살인, 시기는 우리 안에 있는 정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싸움은 큰 분쟁을 의미하고 다툼은 작은 분쟁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이 이기적인 욕심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시기도 우리 안에 있는 욕심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정욕으로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야고보서는 말씀합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4: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가 세상과 벗하는 것은 간음한 죄와 같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원수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지요. 이럴 때 하나님의 마음은 불타오릅니다. 자신의 것을 지키시려는 거룩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시기하기까지 사모하는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여겨서는 곤란합니다. 그 사랑을 무시해서는 더욱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신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의 죄로부터 돌아서지 못하고 결국 망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먼 타국에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한 자신의 질투하시는 사랑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정말 완전히 망해도,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할 말 없는 그들의 끔찍한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징계의 기한이 끝나자마자 그들을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중단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겔 39:2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다시 말해 질투하시는 그 시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망했지만 유독 이스라엘 백성만큼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징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였지만 그들을 징계하기 위해 몽둥이로 사용된 나라가 지나치게 이스라엘을 짓밟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단단히 손을 보셨습니다. 그런 나라들은 여지없이 망했습니다.


슥 2:8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철저히 징계하시지만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그들이 자기의 죄로 인해 맞을 수 있지만 누군가 그들을 지나치게 때리면 참지 못하십니다. 마치 자신의 눈동자를 만지는 것처럼 반응하십니다. 바로 질투하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경솔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행한 이런 질투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엘리야가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왕상 19장 14절입니다.


왕상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내가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유별하오니....여기서 열심이 바로 ‘카나’, 바로 질투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 바로 질투가 유별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도록 하는 거짓 선지자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400명을 상대로 영적 전쟁을 벌였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민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싯딤이란 곳에 머물고 있을 때 거짓 선지자 발람의 술수로 백성들이 꾀임에 빠져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심지어 그들의 신에게 제사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로 인해 염병이 돌았고 그 와중에서도 지도자 한 사람이 나보란 듯이 공개적으로 버젓이 모압 여자를 데리고 장막에 들어가는 것을 본 비느하스가 참지 못하여 창으로 그 두 남녀를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열심을 내는 것은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기 위함이라 말씀합니다. 그가 2차 전도여행 도중 아테네에 들렸을 때 성안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바울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행 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바울은 우상들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제가 한 번 아테네에 갔을 때 신전을 받치고 있는 여신상들이 많이 보았지만 솔직히 저는 그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의 예술 작품 정도로만 보였지요.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질투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영광을 헛된 우상들이 가로채고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질투하시는 사랑, 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질투하는 사랑, 이 두 사랑 사이에는 그 어느 것도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절대불가침의 영역입니다. 비록 합법적인 사랑의 관계라 해도 하나님보다 우선적인 사랑이 되면 그것은 우상이 되고 맙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단지 하나님 사랑보다 우선시될 때 그것은 또 다른 우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자신의 전부인양 사랑하십니다. 거짓되고 허무한 돌덩어리 같은 우상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을 보실 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불타십니다. 바로 그것이 질투하시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아가서에 나오듯이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죽음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가 자신의 전부인 양 질투하는 사랑으로 사랑하시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질투하는 사랑도 합당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마치 우리가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에 대해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CCM 가사가 기억이 납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이 한 주간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는 저의 전부십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과 바꾸지 않겠습니다.’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온 맘과 정성 다해 사랑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목록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